KPI라는 단어를 참 오래간만에 들어봤다. 2021년부터 OKR 중심으로 목표와 성과를 이야기하던 것에서 백도해서 KPI라는 단어를 마주했다. 사실 국내에서 OKR로 목표 설정한다는 분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KPI 방식과 큰 차이가 없다는 평이 대다수다. 그럼 뭐 차이는 있지만 없는 것으로. 현실에 실현되지 않으면 매한가지니 말이다.

기술적 관점에서 KPI는 평가를 위해 존재하고, 평가는 인센티브를 결정한다. KPI를 숫자로 명확하게 정의하는 이유는 평가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함이다. 누구라도 봉급 이외의 큰 보상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회사별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기업은 개인이 아닌 조직 단위 보상 체계를 시행한다. 보상 단위가 실 혹은 센터인 경우도 있었고, 사업부 단위가 된 적도 있지만 전사가 같은 규칙을 따른다. 대기업에서 인센티브를 개인 단위로 지급했다가는 HR조직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대기업에서 KPI는 9월부터 내년도 사업 계획을 통해 윤곽을 잡고, 연말 최종 숫자로 확정된다. 수립된 숫자는 기간 관점에서 연중 내내 측정되기도 하지만 연중 준비 후 다음 해 하반기 특정 시점, 예를 들어 9월 ~ 10월, 늦어도 11월까지는 측정을 완료한다. 다른 축으로 범위 관점에서 전사 공통 KPI와 조직별 KPI로 나뉜다. 전사 공통 KPI는 통상 그룹을 통해 회사(보통 대표이사) 평가에 반영된다. 조직이 가져갈 KPI 개수는 조직 규모와 도메인 특성에 다르지만 평균 2~3개 수준이다. 반농담으로 숫자가 많으면 평가를 종합하는 팀에서 싫어한다.
통합혁신센터 시절, 운영 품질을 다뤘고 장애는 그 가운데 핵심 사항 중 하나였다. 불나면 가장 먼저 “불이야!!” 라고 크게 외치는 것처럼 장애도 마찬가지다. 특히 셀 수 없이 많은 시스템들이 있고, 어떻게든 직간접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장애난 시스템의 문제는 다른 시스템 담당자에게 중요한 시그널이다. 불이 번지지 않도록, 연쇄 작용으로 장애가 번지지 않도록 “신속한” 장애 전파 프로세스가 있어야 한다. 대기업의 사일로 문화에서 “장애”는 잘못이고 질책 대상이라는 인식이 만연한 상황이라 신속한 장애 전파는 쉽지 않은 문제다. 이 어려운 문제를 KPI를 통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전사적으로 장애(운영 서비스의 연속성 보장)가 화두였기 때문에 MTTA(Mean Time to Acknowledge, 장애 발생 후 공유 시간)가 전사 KPI가 됐다. KPI의 평가 구간 설계가 핵심이기 때문에 과거 몇 년 데이터를 바탕으로 등급(구간)을 정의했다. 통신사/네트워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한 장애 유형을 어떻게 반영할지 KPI 설계 과정의 여러 토론 주제가 있었다. 사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광통신 케이블이 공사중에 끊어져 운영 중단(생산 차질)을 발생한 경우도 데이터 분석 과정에서 알게된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KPI에는 가점 혹은 감점 사항을 둘 수 있었는데, Observability 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논의했다. 다만 객관화된 검증 체계를 3자 관점에서 진행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다만 아쉽게도 일관성있는 체계가 아직 준비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공정성을 담보하는 것이 불협화음이 없어야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유보했지만 아마도 앞으로 어느 시점에는 반영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연기나 냄새가 날 때 조치를 취하고, 전파를 하는게 서비스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더 나은 방법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불꽃이 보이면 이미 서비스 중단이나 품질 저하는 이미 벌어진 일이니까.
KPI를 측정하는 시점이 다가올수록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성원들이 경각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특히 MTTA를 통해 달성하고 했던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장애를 보고 하는 사람과 조치를 취하는 사람의 분리였다. 조치하는 사람과 보고하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면 조치하는 사람은 조치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장애 리뷰를 하다보면 장애 발생한 시스템의 담당자의 “연관 시스템의 장애를 인지하지 못했다.” 라는 면피성 이야기가 많았다. KPI가 힘을 발휘하면서 역할 분리가 서서히 이뤄졌고, “빠른 공유로 신속히 조치할 수 있었다.” 라는 감사 이야기도 장애 리뷰 시간에 나오기 시작했다.
MTTA라는 KPI의 시간은 장애 발생 시점으로부터 최초 전파까지 경과 시간을 의미했다. 언제 장애를 인지했느냐가 아니라 최초 발생 시간을 RCA를 통해 파악했기 때문에, 담당자 입장에서 어떻게든 비정상 상황을 팀에서 인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특히 전사 장애 리뷰의 발표를 팀장 이상이 진행했기 때문에 팀장이 앞장서 모니터링과 알람 체계를 사후라도 갖추는 것으로 후속 진행 아이템으로 대부분 가져왔다. 작은 걸음이지만 점진적 개선이 이뤄지는 모습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었다.
대기업의 변화는 리더의 “바뀌어야 한다!”라는 말로만으로 변하지 않는다. 변화를 이끌려면 대기업의 시스템을 활용해야 한다. KPI는 대기업이라는 큰 조직 체계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다. 다만 모든 KPI가 예시로 든 장애 KPI처럼 동작하는 것은 아니다. 내 조직 KPI가 우선이고, 타 조직의 KPI을 굳이 신경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일로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내 인센티브를 다른 조직이 챙겨주지 않으니 말이다. 순작용과 역작용 모두가 존재하기에 목적을 가지고 KPI를 정의하고 설계하는게 매우 중요하다. 전사 공통 KPI는 당연하겠지만, KPI를 수립하는 각 조직의 KPI들이 만들어낼 상호 작용을 조율하는 것도 아마 경영 전략이나 기획 조정 부서가 잘 챙겨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에서 이런 조직이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